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메이너드 케인스 (문단 편집) == 생애 == [[1883년]] [[영국]] 빅토리아 왕조풍의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논리학자였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강사(교무계원)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시의원이었다. 나중에 어머니는 시장까지 지낸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부르주아]] 계층에서 태어난 셈. 이후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하나가 더 태어난다.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 뼈대있는 가문 자제들만 다닌다는 [[이튼 칼리지]]를 졸업했다. 이튼 고등학교 재학 시절 케인즈는 각종 상을 휩쓸었는데, [[연극]]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1902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한 케인즈는 당대의 최고 엘리트과 사도들(Apostles)이라 불리는 학내 비밀 클럽에 가입한다. 그 사도들에는 [[화이트헤드]], 리튼 스트레이치, 이엠 포스터, 레너드 울프, 무어 등이 있었다고 한다. 케인스는 경제학을 전공하지는 않았고[* 애초에 케인즈가 대입했을 당시엔 독립된 경제학과가 없었다. 최초의 경제학과는 공교롭게도 케인즈가 입학하고 1년 뒤 그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최초로 생겨났다.] 다만 대학원 시절에 경제학 수업을 청강한 적은 있다. 그의 전공은 [[수학]]이었으며 오히려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학위를 딴 이후에 케임브리지에 남아서는 주로 철학 강좌를 청강하러 다녔다고 한다. 또 수학과 생활이 싫었는지 친구에게 "나는 지금 내 지성을 탈진시키고, 내 감성을 파괴시키며, 내 천성을 썩히는 중이다."라고 징징대기까지 했다. 실제 그는 수학 실력이 나쁘진 않았지만, '''수학을 싫어했다'''고 한다. 이런 울분 때문인지(...) 훗날 [[경제학]]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수식에 빠져 산다고 맹공을 펼치기도 했다. 물론 상대적인거라 어릴땐 수학 천재 소리도 듣던 사람이었다. 이튼 칼리지 때의 수학 천재 명성과 다르게 대학 학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케인스는 수학과 졸업시험에서 전체 12등을 차지했으나 어려서부터 수학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던 그가 수학과 졸업시험에서 12등을 차지한건 자존심 상한 일이었는지 아니면 수학이 싫었는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들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사람이 수학을 싫어했다는 이야기엔 여러 정황이 있다. 우선 이튼에서의 수학천재 명성과 달리 케임브리지 수학과에서 2류 학생으로 전락한 케인즈는 수학과 학부생활을 힘들어했고, 본인이 만든 저작물과 이론의 정립에 수학을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 지금 케인즈가 만들었다고 알려진 수학 관련 거시경제 이론이나 방정식들은 대부분 [[폴 새뮤얼슨]] 같은 후대 경제학자들이 케인스가 말로 풀어쓴 이론을 수학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또 케임브리지 최고의 천재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사람이 다른거 다 압도적으로 잘하는데 이상하게 수학을 활용하는 것만 상대적으로 못하는 것도 특기할 만한 사항. 다만 케인즈는 이튼 칼리지에 다닐 당시 수학 경시대회에서 많은 상을 휩쓸어 수학 천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케임브리지 수학과에 입학했으니 절대적인 기준에서 수학을 못하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수학 천재로 불리던 시절에도 케인즈는 토론회 같은 활동을 훨씬 더 좋아했고, 잘 안 알려졌을뿐 수학 외의 곳에서 훨씬 더 큰 두각을 보인 학생이었단 것. 이후에 경제학계에 발을 담갔을 때 경제학자들의 수학 놀음을 강하게 비판하고 자꾸 수학을 싫어하고 기피하는 모습과 발언을 보이면서, 사실상 케인즈가 수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억지로 수학 공부를 해왔다는게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몰라도 2부 시험 응시를 하지 않고 공무원 시험을 보기로 결심한다. [[1905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이듬해 합격한다. 이 때 응시자 전체 차석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거뒀으나, 경제학 영역과 수학 영역 이 두 과목에서만 총점을 엄청 까먹는 바람에 케인즈는 수석에서 차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이 때 케인즈는 자신의 경제학 파트 점수를 보고 '''"시험관이 나보다 경제학을 모르는거 같다."'''라는 의미심장한지 아니면 짜증이 섞인 토로인지 모를 말을 남겼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즈음, 스승 [[알프레드 마셜]]이 쓴 '경제원론 1'을 접하게 되는데 이 책이 케인즈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된다. 알프레드 마셜은 경제학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경제학적 직관'과 '실용주의' 를 강조해, 수식 같은거 없이 경제학적 직관에 기반을 두면서 경제학 이론을 설명했는데 이게 딱 케인즈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었던 것. 케인즈는 이 책을 통해 경제학에 흥미를 느껴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고 마셜은 이런 케인즈의 열의와 노력이 기특해 케인즈의 논문에 응원의 메시지를 적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응원의 메시지를 본 케인즈는 친구에게 '''"어쩌면 난 경제학에 재능이 있을지도 몰라"'''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은 경제학 역사상 가장 겸손한 말이자 위대한 경제학자가 막 경제학에 입문할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로 자주 인용되는 문구가 되었다. 마셜은 케인즈를 아껴 그에게 같이 케임브리지에 남아 경제학 연구를 하자고 종용했지만, 케인즈는 당시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약 2년간 인도 사무부(India Office)에서 근무한다. 하지만 관청 생활에 염증을 느꼈는지 이후 마셜의 제안을 받아들여, [[1909년]]부터 모교였던 케임브리지에서 경제학 강사로 일하게 된다. 케인즈는 이후 [[1911년]] 당시 영국의 최대 경제단체였던 왕립경제학회의 공식기관지인 '이코노믹 저널'의 편집장으로 임명되었다. 고작 28살 때의 일이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재무성의 근무위촉을 받아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이후 정부대표로 발탁되어 [[베르사유 조약]]에도 개입했다. 이 때 베르사유 조약,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강력한 대(對) [[독일]] 압박에 불만을 표시한 걸로 전해진다. 그의 저서 중 하나인 <평화의 경제적 귀결(Economic Consequences of Peace)>에서 그는 베르사유 조약이 전후 참전국들의 경제적 회생과 유럽의 경제적 안정성 모두 놓친 조약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베르사유 조약의 과도한 전쟁 배상금이 가져올 문제를 언급했다.[* "이건 20년짜리 휴전조약에 불과하다."는 내용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이건 프랑스 장군인 [[페르디낭 포슈]]의 발언이고 케인즈는 그냥 남은 건 전쟁 뿐이라며 짧게 던졌을 뿐이다. 포슈는 반대로 '독일에 대한 제약이 너무 부족하다'는 의미에서 말한 것. 이는 그가 프랑스군이라서 감정적으로 반응한게 아니라 실제 베르사유 조약의 약점을 지적한 것이다. 즉, 결론을 내리면 케인스와 포슈 두 발언이 모두 옳을 정도로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이 불안정했다는 것이다.] 이후 과도한 전쟁배상금이 2차대전 발발의 씨앗이 되면서 케인즈의 예언은 맞아 떨어지게 되었다. 1920~30년대 케인스는 잇따라 확률론(1921), 화폐개혁론(1923) 등을 발간하며 자신의 이론을 정립시킨다. [[프랭크 램지]]의 지도교수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케임브리지에 램지와 같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데려오려는 노력을 하기도 하였고,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와 같이 수학과 철학을 논하기도 했다고 한다. [[1936년]] [[세계 대공황]]의 영향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시점에 그는 자신의 대표 저작이자 이후 세상을 바꾼 책인 '''<고용, 화폐, 이자에 관한 일반 이론(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펴낸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때에도 영국 재무성에서 일했으며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를 만드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본래 가상의 국제 공용통화인 [[방코르]](Bancor)를 사용하여 그것을 [[기축통화]]로 삼는 새로운 국제통화체계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미국 달러|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본위제]]의 [[브레튼우즈 체제]]가 만들어진 것. 다만 이후 [[국제통화기금]]에서 케인즈의 Bancor안을 일부 차용하여 가치가 거의 변동하지 않는 개념화폐인 '''[[특별인출권]]'''(SDR)을 만들긴 한다. 1942년 남작 작위에 서임되었고, 1946년 4월 21일 사망했다. 자녀가 없어서 작위는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